드라자 미하일로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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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세르비아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에서 나치 점령군에 저항하는 체트니크를 이끌었다. 그는 추축국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간의 갈등에 휘말렸으며, 파르티잔과 비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1943년 이후 추축국과 협력하여 파르티잔 소탕을 지휘했다. 1945년 체트니크가 붕괴된 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946년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후 평가가 엇갈리며, 세르비아에서는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주변 국가에서는 여전히 전쟁 범죄자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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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르티잔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를 해방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수립하고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여 국제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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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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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치차 드라자 (드라자 삼촌) |
출생 이름 | 드라골류브 미하일로비치 |
출생일 | 1893년 4월 27일 |
사망일 | 1946년 7월 17일 |
출생지 | 이반이차, 세르비아 왕국 |
사망지 | 베오그라드, 세르비아 인민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
매장지 | 알려지지 않음 |
서명 | Потпис Драгољуба Драже Михаиловића.svg |
군사 복무 | |
소속 | 세르비아 왕국군 (1910–18)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1918–41)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 (1941–44) 체트니크 (1941–46) |
복무 기간 | 1910–1945 |
최종 계급 | 육군 대장 |
지휘 | 체트니크 운동 |
참전 전투 |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정치 경력 | |
직책 | 체트니크 지도자 |
임기 시작 | 1941년 5월 1일 |
임기 종료 | 1946년 7월 17일 |
국왕 | 페타르 2세 |
전임자 | 코스타 페차나츠 |
후임자 | 단일 지도자 없음 |
훈장 | |
훈장 내역 | [[File:SRB Orden Belog Orla BAR.svg|border|23px]] 흰 독수리 훈장 [[File:Military cross BAR.svg|border|23px]] Military Cross [[File:Croix de Guerre 1939-1945 ribbon.svg|border|23px]] Croix de guerre [[File:Order of the White Lion.svg|border|23px]] Order of the White Lion [[File:St.AlexanderOrder-ribbon.svg|border|23px]] Order of St Alexander [[File:Commemorative Medal of the Albanian Campaign,1920 rib.png|border|23px]] Albanian Commemorative Medal [[File:US Legion of Merit Chief Commander ribbon.png|20px]] 레지옹 오브 메리트 (사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미하일로 미하일로비치 |
어머니 | 스밀랴나 미하일로비치 (결혼 전 성: 페트로비치) |
2. 생애
드라골류브 "드라자" 미하일로비치(Dragoljub "Draža" Mihailović/Драгољуб "Дража" Михаиловићsr)는 1893년 4월 27일 세르비아 왕국 이반지차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베오그라드의 삼촌 밑에서 자랐다. 1910년 세르비아 왕국 육군에 입대하여 제1차·제2차 발칸 전쟁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세르비아 전역이 점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로 탈출하여 저항 운동을 계속했고, 중위로서 전쟁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새롭게 수립된 유고슬라비아 왕국 육군 장교가 되어 프랑스에 군 명령으로 유학을 가거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불가리아와의 외교 협상에 참여하는 등의 경험을 쌓았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에 침공하자 산으로 피신하여 왕국군 잔당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결집하여 체트니크를 결성하고, 그 지도자로서 추축국 군대와 크로아티아를 근거지로 삼았던 우스타샤와 싸웠다. 그러나 동시에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부대(일시적으로 양측이 협력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와도 왕국에 반역하는 반란 부대라는 점에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우스타샤 지지자로 여겨졌던 크로아티아인이나 보스니아인 등 비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에도 가담했다.
체트니크는 왕국 망명 정부와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1943년 이후에는 추축국과 세르비아 구국 정부와 협력하여 파르티잔 소탕을 지휘했다. 이듬해 1944년 소비에트 연방군이 동유럽에 침공하자 전황은 파르티잔 쪽에 유리해졌고, 연합국과 망명 정부의 지원도 파르티잔 쪽으로 바뀌는 등 체트니크를 둘러싼 상황은 악화되었다. 1945년 5월 8일에 체트니크가 붕괴되자 아들과 부하들과 함께 도피 생활을 계속했지만, 이듬해 체포되어 티토 정부에 의해 구국 정부 간부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에게는 연합국으로부터 사면을 호소하는 탄원이 있었지만, 티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7월 17일에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드라골류브 "드라자" 미하일로비치(Dragoljub "Draža" Mihailović/Драгољуб "Дража" Михаиловићsr)는 1893년 4월 27일 세르비아 왕국 이반지차에서 태어났다. 7세에 고아가 되어 삼촌에게 양육되었다. 삼촌들의 영향으로 1910년 세르비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용맹 훈장을 받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여 세르비아 군의 알바니아 철수에 참여했으며, 살로니카 전선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훈장을 받았다.
전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의 왕실 근위대에서 근무했으나, 1920년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 지지자들과의 논쟁으로 인해 물러나야 했다. 이후 스코페에 주둔했으며, 1921년 베오그라드 고등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23년 졸업 후 군 참모부 보좌관으로 승진했고, 1930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프랑스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했다.
1935년 불가리아 왕국 무관으로 소피아에 주둔하며 대령으로 승진했다. 제브노 회원들과 접촉하여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간 동맹 체결 음모를 고려했으나, 불가리아 당국에 발각되어 추방되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무관으로 프라하에 주둔했다.
193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 육군 조직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여 30일간 감금되었고, 베오그라드 육군참모대학 교수가 되었다. 1940년 영국 군무관 주최 행사에 참석했다가 독일 대사의 항의로 30일간 감금 및 강등될 뻔했으나, 네디치 퇴임으로 처벌을 모면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Nazi Germany),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및 점령 이후,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소수의 장교와 병사들은 산악 지대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VKJ) 부대를 찾고자 탈출했다. 몇몇 우스타샤(Ustaše)와 무슬림 부대와의 소규모 충돌과 여러 시설 파괴 공작 시도 후, 미하일로비치와 약 80명의 부하들은 4월 29일 드리나 강(Drina River)을 건너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지역(Territory of the Military Commander in Serbia)(독일 점령지 세르비아)으로 들어갔다. 미하일로비치는 지하 정보망을 구축하고 연합군과 접촉할 계획이었지만, 당시 그가 실제 무장 저항 운동을 시작할 것을 처음부터 예상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체트니크 결성 ====
1941년 5월 초,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라브나 고라에 도착하여 "유고슬라비아 육군 체트니크 부대 사령부"를 결성했다. 이 부대는 7명의 장교와 24명의 부사관 및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징집 대상자와 예비군 명단을 작성하여 활용할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 문화 클럽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민간인 그룹이 합류하여 운동의 선전 부문을 담당했다.
1941년 8월, 미하일로비치는 중앙 국가 위원회라는 민간 자문 기구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드라기샤 바시치와 스테반 몰예비치와 같이 강경한 민족주의적 견해를 가진 인물을 포함한 세르비아 정치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1941년 9월, 미하일로비치는 그의 무선 통신병이 지중해의 한 선박과 교신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영국과 무선 접촉을 맺었다. 9월 13일, 미하일로비치는 페타르 2세 국왕의 망명 정부에 보낸 첫 번째 무선 메시지에서 추축국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VKJ 잔당을 조직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하일로비치는 슬로베니아 장교 루돌프 페린헤크에게 조르지예 라시치, 파블레 주리시치등의 장교들의 구두 승인을 얻어 몬테네그로에서 부대를 조직할 수 있는 서면 권한을 주었다. 미하일로비치는 페린헤크에게 모호하고 상반되는 명령만 내렸는데, 내전을 연기하고 "적을 제거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 추축군 및 파르티잔과의 갈등 ====
미하일로비치는 자신의 부하들이 독일의 보복으로부터 세르비아 민간인을 보호할 수단이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는 추축군이 철수하거나 패배한 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세르비아 부대를 결집하는 전략을 택했다. 반면, 파르티잔은 공개 저항을 주장했는데, 이는 점령군과 싸우고자 하는 체트니크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1941년 9월, 미하일로비치는 체르 체트니크 등 파르티잔에게 병력을 잃기 시작했다.
1941년 9월 19일, 티토는 파르티잔과 체트니크 간의 동맹을 협상하기 위해 미하일로비치와 만났지만, 목표 차이가 너무 커서 실패했다. 티토는 공동 공세를 주장했지만, 미하일로비치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티토의 목표는 체트니크의 후방 공격을 막는 것이었고, 미하일로비치는 대세르비아 건설을 목표로 했기에 서로 상반되었다.
9월 말, 독일군은 우지체 작전을 시작했다. 특수작전행정부(SOE) 요원 허드슨 대위는 영국이 미하일로비치에게 약속했던 물자 공급이 미뤄지면서, 미하일로비치가 파르티잔 운동을 과소평가하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과감한 조치"를 생각했다고 보고했다.
1941년 10월, 시모비치로부터 시기상조의 행동 및 보복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0월 27일, 티토와 다시 만나 합의를 시도했지만, 부차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합의했다. 직후, 미하일로비치는 파르티잔 공격을 준비했다. 10월 28일, 체트니크 연락 장교들은 요제프 마틀에게 파르티잔에 대한 투쟁에서 협력을 제안했다.
11월 1일, 체트니크는 우지체의 파르티잔 본부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같은 날 미하일로비치의 부대는 파르티잔을 사로잡아 11월 6일부터 9일 사이에 최소 41명을 처형했다. 미하일로비치는 이 처형이 있었던 동안 브라지치에 있었다. 11월 3일, 미하일로비치는 독일 장교와의 회담을 연기했다. 11월 11일, 디브치 회담에서 독일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미하일로비치는 독일군에게 "점령군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말했지만, 독일은 체트니크의 완전 항복을 요구했다. 협상 후, 독일군은 미하일로비치를 체포하려 했다.
11월 13일,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독일군에게 365명의 파르티잔 포로를 넘겨주었다. 베르마흐트는 나중에 이들 중 최소 261명을 처형했다.
미하일로비치의 공격은 실패했고, 파르티잔은 역공을 가했다. 미하일로비치는 병력과 장비를 잃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11월 중순, 독일은 서부 모라바 작전을 시작했다. 티토는 미하일로비치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11월 20일 또는 21일에 휴전했다. 11월 28일, 티토와 마지막 전화 통화를 했다.
12월 3일, 독일군은 미하일로비치 작전을 명령했다. 12월 5일, 공격 경고를 받고 무전기 폐쇄, 지휘부 및 부대를 해산했다. 12월 10일, 독일군이 현상금을 걸었다.


==== 몬테네그로 및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지역 활동 ====
1942년 1월,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군과 무선 통신을 재개했다. 1942년 초, 슬로보단 요바노비치를 수상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는 미하일로비치의 지위 강화를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설정했다. 1월 11일, 미하일로비치는 망명 정부에 의해 "육군, 해군, 공군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3월, 미하일로비치는 은신 중이었지만, 네디치 정부는 그의 위치를 찾아냈고, 독일 점령군의 승인을 받은 만남이 그와 아치모비치 사이에서 열렸다. 토마세비치에 따르면, 이 회의 이후 파울 바더 장군에게 미하일로비치가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네디치 정부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알렸으나, 바더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1942년 4월, 여전히 세르비아에 은신 중이던 미하일로비치는 영국 특사 허드슨과 접촉을 재개했고, 허드슨은 미하일로비치의 송신기를 사용하여 카이로에 있는 연합군 본부로 무선 송신을 재개할 수 있었다. 1942년 6월 1일, 미하일로비치는 몬테네그로로 이동하여 그곳에 본부를 설치했다. 6월 10일, 그는 공식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조국군 최고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일주일 후 그는 육군 장군으로 승진했다.
몬테네그로에서 미하일로비치는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현지 체트니크 지도자 바요 스타니시치와 파블레 쥬리시치는 이탈리아인들과 합의에 도달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협력하고 있었다. 미하일로비치는 나중에 1946년 재판에서 몬테네그로에 도착하기 전에는 이러한 합의를 몰랐고, 도착한 후에야 받아들여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고, 블라조 쥬카노비치를 몬테네그로 "국가주의 세력"의 명목상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미하일로비치는 공산주의 세력의 파괴를 승인했지만, 발칸 반도에 연합군이 상륙할 것을 기대하며 식량, 무기, 탄약을 얻기 위해 체트니크 사령관들의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이용하려고 했다.
1942년 12월 1일, 쥬리시치는 샤호비치에서 체트니크 "청년 회의"를 조직했다. 역사가 파블로비치가 "극단주의와 불관용을 표현했다"고 쓴 이 회의에서,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이탈리아의 일부에 대한 국가주의적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 결의안은 일정 기간의 과도기적 체트니크 독재 정권을 가진 군주제의 복원을 전제로 했다. 미하일로비치와 쥬카노비치는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표를 보냈다. 같은 달, 미하일로비치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파르티잔 부대는 우스타샤(세르비아인들을 가장 잔인하게 학살한 자들) 유대인, 크로아티아인, 달마티아인, 불가리아인, 터키인, 헝가리인, 그리고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과 같은 온갖 종류의 악당들로 가득 차 있다."라고 알렸다.

NDH에서 전쟁 전 체트니크 조직의 지도자인 일리야 트리푸노비치-비르차닌은 달마티아, 리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체트니크를 지휘했다. 그는 파르티잔과 우스타샤에 대항하는 "국가주의자" 저항을 이끌었고 미하일로비치를 공식 지도자로 인정했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행동했으며, 그의 부대는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현지 반공 자원 봉사 민병대(MVAC)로 사용되었다. 이탈리아 사령관 마리오 로아타는 이탈리아인의 목숨을 보존하고 우스타샤와 독일군에 대항하며 현지 지도자들을 이용하여 체트니크들 사이에서 미하일로비치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도브로슬라브 예브데비치가 이끄는 체트니크들은 몬테네그로에서 우스타샤에 대항하는 보스니아 세르비아 인구를 돕기 위해 왔다. 그들은 8월 이탈리아군이 개입할 때까지 포차에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
내부의 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연합군이 추축국을 물리친 후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를 바란 미하일로비치는 몬테네그로에서 주로 파르티잔뿐만 아니라 우스타샤와 디미트리예 료티치의 세르비아 자원 봉사 군단(SDK)에 대항하는 유고슬라비아 여러 지역의 작전을 지휘하는 데 집중했다. 많은 테러 행위가 체트니크 집단에 의해 실제 또는 인식된 다양한 적들에게 자행되었고, 1942년 10월부터 1943년 2월 사이에 정점에 달했다.
==== 테러 전술과 청소 작전 ====
체트니크 이데올로기는 인구 이동을 강제하는 방식으로 대세르비아를 달성한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우스타샤와 그들과 연합한 무슬림 세력이 자행한 폭력적인 행위에 대한 반응으로, 체트니크 부대는 학살과 재산 파괴를 포함한 수많은 폭력 행위에 가담했으며, 비세르비아계 집단을 몰아내기 위해 테러 전술을 사용했다. 1942년 봄, 미하일로비치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무슬림 인구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 국민들이 더 이상 그들을 우리 곁에 두기를 원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미 지금부터 그들이 튀르키예 또는 국경 밖 어느 곳으로든 떠나도록 준비해야 한다."
1941년 12월 20일, 미하일로비치는 파블레 쥬리시치에게 보낸 지시에서 대세르비아를 만들기 위해 비세르비아계 요소를 청소할 것을 규정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이 문서가 1941년 12월 독일군에 의해 라브나 고라에서 쫓겨난 후 미하일로비치에게 도달하지 못한 쥬리시치가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시문에 명시된 목표는 다음과 같다.
# 페타르 2세 국왕의 섭정 아래 전체 국가의 자유를 위한 투쟁.
# 대유고슬라비아와 그 안에 민족적으로 순수한 대세르비아 건설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리엠, 바나트, 바치카 포함).
# 이탈리아와 독일의 지배 아래 여전히 해방되지 않은 모든 슬로베니아 영토(트리에스테, 고리치아, 이스트리아, 카린티아)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와 알바니아 북부(슈코데르)를 유고슬라비아에 포함시키기 위한 투쟁.
# 모든 소수 민족과 비국민 요소(''즉'', 파르티잔과 그 지지자들)의 국가 영토 청소.
# 산자크에서 무슬림 인구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인구를 청소함으로써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와 슬로베니아 사이에 인접한 국경을 만드는 것.
지시가 위조되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미하일로비치는 청소라는 이념적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취해진 폭력 행위 모두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1943년 쥬리시치는 체트니크 최고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무슬림에 대한 "청소 작전"을 수행했고, 학살한 수천 명의 노인, 여성, 어린이들을 미하일로비치에게 보고했다. 미하일로비치는 "학살을 막을 수 없었거나, 막으려 하지 않았다". 1946년 미하일로비치는 "그의 사령관들에게 무슬림(그가 터크라고 부른 사람들)과 크로아티아인(그가 우스타샤라고 부른 사람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그의 재판에서 미하일로비치는 크로아티아와 무슬림 마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며, 일부 부하들이 그러한 활동을 그에게 숨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중에 "유고슬라비아 사람들 사이에 국가적, 종교적 증오와 불화를 선동하여 체트니크 부대가 점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크로아티아인, 무슬림뿐만 아니라 세르비아 인구에 대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는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세르비아에서 파르티잔과 그 지지자들을 상대로 일련의 범죄를 저질렀다. 흑삼은 체트니크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테러와 숙청하는 것으로 알려진 처형대였다. 브라니치와 드루고바츠의 학살과 같은 파르티잔 지지자들에 대한 가장 큰 범죄는 전체 체트니크 부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파르티잔 지지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은 미하일로비치로부터 직접 나왔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12일 그의 사령관 드라구틴 케세로비치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청소하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르비아에 존재할 수 없다.[...]그들의 지지자들과 은닉자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라. 지지자들이 없으면 그들은 존재할 수 없다." 비슷한 메시지를 그는 1943년 11월 체트니크 사령관 라도슬라브 쥬리치와 니콜라 칼라비치에게도 보냈다.
==== 영국과의 관계 ====
1942년 11월 15일, 허드슨(Hudson) 대위는 카이로로 보낸 전보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탈리아군과 협력할 가능성을 보고했다. 그는 체트니크 지도자가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믿는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과의 어떤 타당한 합의"에 이를 수도 있다고 밝혔다.[1] 12월, 영국 특수작전집행부(SOE) 런던 본부의 피터 부게이(Peter Boughey) 소령은 미하일로비치가 이탈리아와 협력하는 퀴즐링이라고 주장했다.[2] 영국 외무부는 부게이의 발표를 "실수"라고 불렀지만, 영국은 상황과 미하일로비치의 무활동에 대해 우려했다.[3]

1943년 1월, SOE는 처칠에게 미하일로비치의 하급 지휘관들이 이탈리아 당국과 지역적으로 합의를 했지만, 미하일로비치 자신이 독일과 거래한 증거는 없다고 보고했다.[4] 2월, 영국 연락 장교들은 미하일로비치가 "결코" 독일과 접촉한 적이 없지만, 그의 부대가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이탈리아를 돕는 경우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베일리는 미하일로비치가 영국으로부터 받는 부족한 지원에 점점 불만을 품고 있다고 보고했다.[5]
{{인용구 상자
| quote = "미하일로비치 장군은 반독일 감정을 반파르티잔 감정으로 돌리는 데 자신의 공헌을 보았습니다. 그의 행동을 연합군의 대의에 해로운 것 이외의 어떤 것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예수회적인 근거에서만 가능합니다." [5]
| source = 영국 사절단 일원 바질 데이비슨(Basil Davidson)
| align =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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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2월 28일, 리포보에서 미하일로비치는 그의 부대에 연설하면서 영국을 "배신의 알비온(perfidious Albion)"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세르비아인들이 완전히 고립되었고, 영국은 페타르 2세 국왕과 그의 정부를 사실상 포로로 잡고 있으며, 파르티잔을 섬멸할 수단을 주는 한 이탈리아의 도움을 계속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적은 우스타샤, 파르티잔, 크로아티아인, 무슬림이며, 그들을 처리한 후에야 독일과 이탈리아로 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7][8] 이러한 미하일로비치의 연설은 영국과 체트니크의 협력이 끝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 네레트바 전투 패배 ====
1943년 백색 작전 당시, 이탈리아는 체트니크를 적극 지원하여 파르티잔에게 치명타를 입히기를 기대했다. 독일은 이러한 협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2월 말, 연설 직후 미하일로비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헤르체고비나의 네레트바 강 부근에 있는 자신의 부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파르티잔은 혼란에 빠진 체트니크 부대를 격파하고 네레트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3월, 파르티잔은 시간을 벌고 체트니크를 제압하기 위해 추축군과 휴전 협상을 벌였다. 리벤트로프와 히틀러는 마침내 하급자들의 명령을 무효화하고 그러한 접촉을 금지했지만, 파르티잔은 이 짧은 휴전 기간 동안 이익을 얻었다. 이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체트니크 지원이 중단되었고, 티토의 부대는 미하일로비치의 부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5월, 독일 정보부는 파르티잔에 대항하는 동맹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미하일로비치와 접촉하려 했다. 콜라신에서 그들은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체트니크 장교를 만났다. 그들은 그 장교가 미하일로비치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남자는 미하일로비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윌리엄 베일리는 같은 시기에 미하일로비치가 다른 지역에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독일 지휘부는 "적과의 협상" 시도에 강하게 반발했다.
독일군은 그다음으로 슈바르츠 작전이라는 작전명을 가진 다음 작전으로 몬테네그로 체트니크를 공격했다. 쥬리시치는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독일과 단기 협력을 미하일로비치에게 제안한 것으로 보이며, 미하일로비치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쥬리시치는 결국 콜라신에 있는 자신의 본부를 파르티잔으로부터 방어했다. 5월 14일, 독일군이 콜라신에 진입하여 쥬리시치를 사로잡았고, 미하일로비치는 탈출했다.
5월 말, 몬테네그로 대부분을 장악한 이탈리아는 체트니크, 특히 미하일로비치의 부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미하일로비치 체포에 50만 리라, 티토 체포에 100만 리라의 현상금을 걸었다.
==== 연합군 지원 변경 ====
1943년 4월과 5월, 영국은 파르티잔에게 사절단을 파견하고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체트니크 연락장교였던 재스퍼 루섬(Jasper Rootham) 소령은 체트니크와 독일군 간의 교전이 발생했지만, 항상 독일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보고했다. 그해 여름, 영국은 체트니크와 파르티잔 모두에게 물자를 지원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면서 몬테네그로의 체트니크는 독일군과 파르티잔 양측의 공격을 받았다. 파르티잔은 이전의 "체트니크 수도"였던 콜라신을 포함한 몬테네그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1943년 10월,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국의 요청에 따라 두 차례 파괴 작전을 수행했다.
1943년 11월과 12월까지 독일군은 티토가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0월 말, 미하일로비치는 모든 체트니크 부대에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독일과 협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국은 체트니크가 추축군보다 파르티잔과 싸우는 데 더 열의를 보인다는 사실에 점점 더 우려했다. 1943년 10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앤서니 이든은 미하일로비치의 무대책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1943년 11월 말 테헤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은 파르티잔을 지지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제한된 관심을 표명했지만 그들이 최대한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1943년 12월 10일, 처칠은 페타르 2세 국왕을 만나 미하일로비치가 적과 협력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미하일로비치를 유고슬라비아 내각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4년 1월 12일, 카이로의 특수작전본부(SOE)는 외무부에 보고서를 보내 미하일로비치의 사령관들이 독일군 및 이탈리아군과 협력했고 미하일로비치 자신이 그들의 행동을 묵인하고 특정 경우에는 승인했다고 말했다. 1944년 봄, 영국은 미하일로비치에게
2. 2. 1. 체트니크 결성
1941년 5월 초,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라브나 고라에 도착하여 "유고슬라비아 육군 체트니크 부대 사령부"를 결성했다. 이 부대는 7명의 장교와 24명의 부사관 및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징집 대상자와 예비군 명단을 작성하여 활용할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 문화 클럽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민간인 그룹이 합류하여 운동의 선전 부문을 담당했다.1941년 8월, 미하일로비치는 중앙 국가 위원회라는 민간 자문 기구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드라기샤 바시치와 스테반 몰예비치와 같이 강경한 민족주의적 견해를 가진 인물을 포함한 세르비아 정치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1941년 9월, 미하일로비치는 그의 무선 통신병이 지중해의 한 선박과 교신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영국과 무선 접촉을 맺었다. 9월 13일, 미하일로비치는 페타르 2세 국왕의 망명 정부에 보낸 첫 번째 무선 메시지에서 추축국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VKJ 잔당을 조직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하일로비치는 슬로베니아 장교 루돌프 페린헤크에게 조르지예 라시치, 파블레 주리시치등의 장교들의 구두 승인을 얻어 몬테네그로에서 부대를 조직할 수 있는 서면 권한을 주었다. 미하일로비치는 페린헤크에게 모호하고 상반되는 명령만 내렸는데, 내전을 연기하고 "적을 제거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2. 2. 2. 추축군 및 파르티잔과의 갈등
미하일로비치는 자신의 부하들이 독일의 보복으로부터 세르비아 민간인을 보호할 수단이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는 추축군이 철수하거나 패배한 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세르비아 부대를 결집하는 전략을 택했다. 반면, 파르티잔은 공개 저항을 주장했는데, 이는 점령군과 싸우고자 하는 체트니크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1941년 9월, 미하일로비치는 체르 체트니크 등 파르티잔에게 병력을 잃기 시작했다.1941년 9월 19일, 티토는 파르티잔과 체트니크 간의 동맹을 협상하기 위해 미하일로비치와 만났지만, 목표 차이가 너무 커서 실패했다. 티토는 공동 공세를 주장했지만, 미하일로비치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티토의 목표는 체트니크의 후방 공격을 막는 것이었고, 미하일로비치는 대세르비아 건설을 목표로 했기에 서로 상반되었다.
9월 말, 독일군은 우지체 작전을 시작했다. 특수작전행정부(SOE) 요원 허드슨 대위는 영국이 미하일로비치에게 약속했던 물자 공급이 미뤄지면서, 미하일로비치가 파르티잔 운동을 과소평가하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과감한 조치"를 생각했다고 보고했다.
1941년 10월, 시모비치로부터 시기상조의 행동 및 보복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0월 27일, 티토와 다시 만나 합의를 시도했지만, 부차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합의했다. 직후, 미하일로비치는 파르티잔 공격을 준비했다. 10월 28일, 체트니크 연락 장교들은 요제프 마틀에게 파르티잔에 대한 투쟁에서 협력을 제안했다.
11월 1일, 체트니크는 우지체의 파르티잔 본부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같은 날 미하일로비치의 부대는 파르티잔을 사로잡아 11월 6일부터 9일 사이에 최소 41명을 처형했다. 미하일로비치는 이 처형이 있었던 동안 브라지치에 있었다. 11월 3일, 미하일로비치는 독일 장교와의 회담을 연기했다. 11월 11일, 디브치 회담에서 독일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미하일로비치는 독일군에게 "점령군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말했지만, 독일은 체트니크의 완전 항복을 요구했다. 협상 후, 독일군은 미하일로비치를 체포하려 했다.
11월 13일,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독일군에게 365명의 파르티잔 포로를 넘겨주었다. 베르마흐트는 나중에 이들 중 최소 261명을 처형했다.
미하일로비치의 공격은 실패했고, 파르티잔은 역공을 가했다. 미하일로비치는 병력과 장비를 잃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11월 중순, 독일은 서부 모라바 작전을 시작했다. 티토는 미하일로비치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11월 20일 또는 21일에 휴전했다. 11월 28일, 티토와 마지막 전화 통화를 했다.
12월 3일, 독일군은 미하일로비치 작전을 명령했다. 12월 5일, 공격 경고를 받고 무전기 폐쇄, 지휘부 및 부대를 해산했다. 12월 10일, 독일군이 현상금을 걸었다.
2. 2. 3. 몬테네그로 및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지역 활동
1942년 1월,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군과 무선 통신을 재개했다. 1942년 초, 슬로보단 요바노비치를 수상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는 미하일로비치의 지위 강화를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설정했다. 1월 11일, 미하일로비치는 망명 정부에 의해 "육군, 해군, 공군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3월, 미하일로비치는 은신 중이었지만, 네디치 정부는 그의 위치를 찾아냈고, 독일 점령군의 승인을 받은 만남이 그와 아치모비치 사이에서 열렸다. 토마세비치에 따르면, 이 회의 이후 파울 바더 장군에게 미하일로비치가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네디치 정부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알렸으나, 바더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1942년 4월, 여전히 세르비아에 은신 중이던 미하일로비치는 영국 특사 허드슨과 접촉을 재개했고, 허드슨은 미하일로비치의 송신기를 사용하여 카이로에 있는 연합군 본부로 무선 송신을 재개할 수 있었다. 1942년 6월 1일, 미하일로비치는 몬테네그로로 이동하여 그곳에 본부를 설치했다. 6월 10일, 그는 공식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조국군 최고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일주일 후 그는 육군 장군으로 승진했다.
몬테네그로에서 미하일로비치는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현지 체트니크 지도자 바요 스타니시치와 파블레 쥬리시치는 이탈리아인들과 합의에 도달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협력하고 있었다. 미하일로비치는 나중에 1946년 재판에서 몬테네그로에 도착하기 전에는 이러한 합의를 몰랐고, 도착한 후에야 받아들여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고, 블라조 쥬카노비치를 몬테네그로 "국가주의 세력"의 명목상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미하일로비치는 공산주의 세력의 파괴를 승인했지만, 발칸 반도에 연합군이 상륙할 것을 기대하며 식량, 무기, 탄약을 얻기 위해 체트니크 사령관들의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이용하려고 했다.
1942년 12월 1일, 쥬리시치는 샤호비치에서 체트니크 "청년 회의"를 조직했다. 역사가 파블로비치가 "극단주의와 불관용을 표현했다"고 쓴 이 회의에서,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이탈리아의 일부에 대한 국가주의적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 결의안은 일정 기간의 과도기적 체트니크 독재 정권을 가진 군주제의 복원을 전제로 했다. 미하일로비치와 쥬카노비치는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표를 보냈다. 같은 달, 미하일로비치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파르티잔 부대는 우스타샤(세르비아인들을 가장 잔인하게 학살한 자들) 유대인, 크로아티아인, 달마티아인, 불가리아인, 터키인, 헝가리인, 그리고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과 같은 온갖 종류의 악당들로 가득 차 있다."라고 알렸다.
NDH에서 전쟁 전 체트니크 조직의 지도자인 일리야 트리푸노비치-비르차닌은 달마티아, 리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체트니크를 지휘했다. 그는 파르티잔과 우스타샤에 대항하는 "국가주의자" 저항을 이끌었고 미하일로비치를 공식 지도자로 인정했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행동했으며, 그의 부대는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현지 반공 자원 봉사 민병대(MVAC)로 사용되었다. 이탈리아 사령관 마리오 로아타는 이탈리아인의 목숨을 보존하고 우스타샤와 독일군에 대항하며 현지 지도자들을 이용하여 체트니크들 사이에서 미하일로비치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도브로슬라브 예브데비치가 이끄는 체트니크들은 몬테네그로에서 우스타샤에 대항하는 보스니아 세르비아 인구를 돕기 위해 왔다. 그들은 8월 이탈리아군이 개입할 때까지 포차에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
내부의 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연합군이 추축국을 물리친 후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를 바란 미하일로비치는 몬테네그로에서 주로 파르티잔뿐만 아니라 우스타샤와 디미트리예 료티치의 세르비아 자원 봉사 군단(SDK)에 대항하는 유고슬라비아 여러 지역의 작전을 지휘하는 데 집중했다. 많은 테러 행위가 체트니크 집단에 의해 실제 또는 인식된 다양한 적들에게 자행되었고, 1942년 10월부터 1943년 2월 사이에 정점에 달했다.
2. 2. 4. 테러 전술과 청소 작전
체트니크 이데올로기는 인구 이동을 강제하는 방식으로 대세르비아를 달성한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우스타샤와 그들과 연합한 무슬림 세력이 자행한 폭력적인 행위에 대한 반응으로, 체트니크 부대는 학살과 재산 파괴를 포함한 수많은 폭력 행위에 가담했으며, 비세르비아계 집단을 몰아내기 위해 테러 전술을 사용했다. 1942년 봄, 미하일로비치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무슬림 인구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 국민들이 더 이상 그들을 우리 곁에 두기를 원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미 지금부터 그들이 튀르키예 또는 국경 밖 어느 곳으로든 떠나도록 준비해야 한다."1941년 12월 20일, 미하일로비치는 파블레 쥬리시치에게 보낸 지시에서 대세르비아를 만들기 위해 비세르비아계 요소를 청소할 것을 규정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이 문서가 1941년 12월 독일군에 의해 라브나 고라에서 쫓겨난 후 미하일로비치에게 도달하지 못한 쥬리시치가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시문에 명시된 목표는 다음과 같다.
# 페타르 2세 국왕의 섭정 아래 전체 국가의 자유를 위한 투쟁.
# 대유고슬라비아와 그 안에 민족적으로 순수한 대세르비아 건설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리엠, 바나트, 바치카 포함).
# 이탈리아와 독일의 지배 아래 여전히 해방되지 않은 모든 슬로베니아 영토(트리에스테, 고리치아, 이스트리아, 카린티아)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와 알바니아 북부(슈코데르)를 유고슬라비아에 포함시키기 위한 투쟁.
# 모든 소수 민족과 비국민 요소(''즉'', 파르티잔과 그 지지자들)의 국가 영토 청소.
# 산자크에서 무슬림 인구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인구를 청소함으로써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와 슬로베니아 사이에 인접한 국경을 만드는 것.
지시가 위조되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미하일로비치는 청소라는 이념적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취해진 폭력 행위 모두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1943년 쥬리시치는 체트니크 최고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무슬림에 대한 "청소 작전"을 수행했고, 학살한 수천 명의 노인, 여성, 어린이들을 미하일로비치에게 보고했다. 미하일로비치는 "학살을 막을 수 없었거나, 막으려 하지 않았다". 1946년 미하일로비치는 "그의 사령관들에게 무슬림(그가 터크라고 부른 사람들)과 크로아티아인(그가 우스타샤라고 부른 사람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그의 재판에서 미하일로비치는 크로아티아와 무슬림 마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며, 일부 부하들이 그러한 활동을 그에게 숨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중에 "유고슬라비아 사람들 사이에 국가적, 종교적 증오와 불화를 선동하여 체트니크 부대가 점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크로아티아인, 무슬림뿐만 아니라 세르비아 인구에 대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는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세르비아에서 파르티잔과 그 지지자들을 상대로 일련의 범죄를 저질렀다. 흑삼은 체트니크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테러와 숙청하는 것으로 알려진 처형대였다. 브라니치와 드루고바츠의 학살과 같은 파르티잔 지지자들에 대한 가장 큰 범죄는 전체 체트니크 부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파르티잔 지지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은 미하일로비치로부터 직접 나왔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12일 그의 사령관 드라구틴 케세로비치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청소하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르비아에 존재할 수 없다.[...]그들의 지지자들과 은닉자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라. 지지자들이 없으면 그들은 존재할 수 없다." 비슷한 메시지를 그는 1943년 11월 체트니크 사령관 라도슬라브 쥬리치와 니콜라 칼라비치에게도 보냈다.
2. 2. 5. 영국과의 관계
1942년 11월 15일, 허드슨(Hudson) 대위는 카이로로 보낸 전보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탈리아군과 협력할 가능성을 보고했다. 그는 체트니크 지도자가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믿는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과의 어떤 타당한 합의"에 이를 수도 있다고 밝혔다.[1] 12월, 영국 특수작전집행부(SOE) 런던 본부의 피터 부게이(Peter Boughey) 소령은 미하일로비치가 이탈리아와 협력하는 퀴즐링이라고 주장했다.[2] 영국 외무부는 부게이의 발표를 "실수"라고 불렀지만, 영국은 상황과 미하일로비치의 무활동에 대해 우려했다.[3]1943년 1월, SOE는 처칠에게 미하일로비치의 하급 지휘관들이 이탈리아 당국과 지역적으로 합의를 했지만, 미하일로비치 자신이 독일과 거래한 증거는 없다고 보고했다.[4] 2월, 영국 연락 장교들은 미하일로비치가 "결코" 독일과 접촉한 적이 없지만, 그의 부대가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이탈리아를 돕는 경우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베일리는 미하일로비치가 영국으로부터 받는 부족한 지원에 점점 불만을 품고 있다고 보고했다.[5]
{{인용구 상자
| quote = "미하일로비치 장군은 반독일 감정을 반파르티잔 감정으로 돌리는 데 자신의 공헌을 보았습니다. 그의 행동을 연합군의 대의에 해로운 것 이외의 어떤 것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예수회적인 근거에서만 가능합니다." [5]
| source = 영국 사절단 일원 바질 데이비슨(Basil Davi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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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 28일, 리포보에서 미하일로비치는 그의 부대에 연설하면서 영국을 "배신의 알비온(perfidious Albion)"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세르비아인들이 완전히 고립되었고, 영국은 페타르 2세 국왕과 그의 정부를 사실상 포로로 잡고 있으며, 파르티잔을 섬멸할 수단을 주는 한 이탈리아의 도움을 계속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적은 우스타샤, 파르티잔, 크로아티아인, 무슬림이며, 그들을 처리한 후에야 독일과 이탈리아로 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7][8] 이러한 미하일로비치의 연설은 영국과 체트니크의 협력이 끝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2. 2. 6. 네레트바 전투 패배
1943년 백색 작전 당시, 이탈리아는 체트니크를 적극 지원하여 파르티잔에게 치명타를 입히기를 기대했다. 독일은 이러한 협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2월 말, 연설 직후 미하일로비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헤르체고비나의 네레트바 강 부근에 있는 자신의 부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파르티잔은 혼란에 빠진 체트니크 부대를 격파하고 네레트바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3월, 파르티잔은 시간을 벌고 체트니크를 제압하기 위해 추축군과 휴전 협상을 벌였다. 리벤트로프와 히틀러는 마침내 하급자들의 명령을 무효화하고 그러한 접촉을 금지했지만, 파르티잔은 이 짧은 휴전 기간 동안 이익을 얻었다. 이 기간 동안 이탈리아의 체트니크 지원이 중단되었고, 티토의 부대는 미하일로비치의 부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5월, 독일 정보부는 파르티잔에 대항하는 동맹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미하일로비치와 접촉하려 했다. 콜라신에서 그들은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체트니크 장교를 만났다. 그들은 그 장교가 미하일로비치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남자는 미하일로비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윌리엄 베일리는 같은 시기에 미하일로비치가 다른 지역에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독일 지휘부는 "적과의 협상" 시도에 강하게 반발했다.
독일군은 그다음으로 슈바르츠 작전이라는 작전명을 가진 다음 작전으로 몬테네그로 체트니크를 공격했다. 쥬리시치는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독일과 단기 협력을 미하일로비치에게 제안한 것으로 보이며, 미하일로비치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쥬리시치는 결국 콜라신에 있는 자신의 본부를 파르티잔으로부터 방어했다. 5월 14일, 독일군이 콜라신에 진입하여 쥬리시치를 사로잡았고, 미하일로비치는 탈출했다.
5월 말, 몬테네그로 대부분을 장악한 이탈리아는 체트니크, 특히 미하일로비치의 부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미하일로비치 체포에 50만 리라, 티토 체포에 100만 리라의 현상금을 걸었다.
2. 2. 7. 연합군 지원 변경
1943년 4월과 5월, 영국은 파르티잔에게 사절단을 파견하고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체트니크 연락장교였던 재스퍼 루섬(Jasper Rootham) 소령은 체트니크와 독일군 간의 교전이 발생했지만, 항상 독일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보고했다. 그해 여름, 영국은 체트니크와 파르티잔 모두에게 물자를 지원했다.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면서 몬테네그로의 체트니크는 독일군과 파르티잔 양측의 공격을 받았다. 파르티잔은 이전의 "체트니크 수도"였던 콜라신을 포함한 몬테네그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1943년 10월,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국의 요청에 따라 두 차례 파괴 작전을 수행했다.
1943년 11월과 12월까지 독일군은 티토가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0월 말, 미하일로비치는 모든 체트니크 부대에 파르티잔에 대항하여 독일과 협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국은 체트니크가 추축군보다 파르티잔과 싸우는 데 더 열의를 보인다는 사실에 점점 더 우려했다. 1943년 10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앤서니 이든은 미하일로비치의 무대책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1943년 11월 말 테헤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은 파르티잔을 지지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제한된 관심을 표명했지만 그들이 최대한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1943년 12월 10일, 처칠은 페타르 2세 국왕을 만나 미하일로비치가 적과 협력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미하일로비치를 유고슬라비아 내각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4년 1월 12일, 카이로의 특수작전본부(SOE)는 외무부에 보고서를 보내 미하일로비치의 사령관들이 독일군 및 이탈리아군과 협력했고 미하일로비치 자신이 그들의 행동을 묵인하고 특정 경우에는 승인했다고 말했다. 1944년 봄, 영국은 미하일로비치에게 파견된 연락장교를 철수했다.
한편, 미하일로비치는 그의 운동 조직을 개선하고자 했다. 1944년 1월 25일, 지브코 토팔로비치의 도움으로 바에서 바 회의를 조직했다.
1944년 5월 이후 영국 사절단이 철수하면서,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국과 그의 정부에 무선 메시지를 계속 보냈지만 더 이상 답장을 받지 못했다.
2. 2. 8. 할리어드 작전
1944년 7월과 8월, 미하일로비치는 자신의 부대에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제60수송비행대대(TCS)와 협력하여 1944년 8월부터 12월 사이에 수백 명의 추락한 연합군 조종사들을 구출하는 할리어드 작전에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이 공로로 그는 사후에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으로부터 공훈훈장을 받았다.역사가 마르코 아틸라 호어에 따르면, "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들이 독일 조종사들을 구출하여 독일군에게 안전하게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영국보다 발칸 지역에 대한 정보력이 약했던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실상을 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반공주의자 미하일로비치에 대한 영국의 지원 중단에 대해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고, 파르티잔에 대해서는 더욱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할리어드 작전에서는 토팔로비치와 함께 여러 유고슬라비아인들도 탈출했다. 그들은 미하일로비치의 운동에 대한 해외 지원을 더 확보하려고 했지만, 이는 연합군의 정책을 역전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미국은 3월에 미하일로비치에게 정보부대를 파견했지만, 처칠이 루스벨트에게 모든 지원을 티토에게 제공해야 하며, 미국이 미하일로비치를 지원할 경우 "완전한 혼란"이 초래될 것이라고 조언한 후 철수했다.
2. 2. 9. 망명 정부
1944년 7월, 이반 슈바시치는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를 구성했는데, 미하일로비치는 장관으로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육군의 공식 참모총장으로 남아 있었다. 8월 29일, 그의 정부의 권고에 따라 페테르 국왕은 왕실 칙령으로 최고 사령부를 해산하여 미하일로비치의 직책을 폐지했다. 9월 12일, 페테르 국왕은 런던에서 메시지를 방송하여 8월 29일 칙령의 요지를 발표하고 모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에게 "티토 원수의 지휘 아래 국가 해방군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또한 "적과의 협력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국왕의 이름과 왕관의 권위를 남용한 것"을 강력히 비난한다고 선포했다. 국왕은 미하일로비치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분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페테르는 영국과의 격렬한 논의 끝에 미하일로비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이 메시지는 체트니크들의 사기를 꺾는 데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많은 병사들이 방송 후 미하일로비치를 떠났고, 일부는 그에게 대한 충성심으로 남았다.미하일로비치는 전 동맹국들에게 버려진 사실에 분개했고, 1944년 8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3년 전, 나는 나치즘과 파시즘의 형태인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무기를 들었다. 이 대의를 위해 싸우는 동안 나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열 번의 위기를 겪었다. 만약 내가 새로운 형태의 독재에 맞서 싸우다 죽어야 한다면, 민주주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버려진 것에 대해 분노하며 죽겠지만, 나 자신이 용감하고 정직하게 싸웠고 나의 대의를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하며 죽을 것이다."'''
2. 2. 10. 1944-45년 패배
1944년 8월 말, 소련의 붉은 군대가 유고슬라비아 동부 국경에 도착했다. 9월 초, 소련은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추축국에 대항하도록 강제했다. 한편,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는 세르비아에 대한 파르티잔의 침입에 저항할 만한 무장이 너무 부족했다. 니콜라 칼라비치, 네슈코 네디치, 드라고슬라브 라치치 등 미하일로비치의 장교들은 8월 11일에 독일군 장교들과 만나 미하일로비치와 노이바허의 회담을 주선하고 협력 증진을 위한 조건을 제시했다. 네디치는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반공 세력의 연합군을 편성할 것을 제안했으며, 미하일로비치와의 비밀 회담을 주선했는데, 이 회담은 8월 20일경에 열린 것으로 보인다. 기존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어두운 방에서 만났고 미하일로비치는 대부분 침묵을 지켰으며, 네디치는 나중에 자신이 실제로 미하일로비치를 만났는지 확신하지 못할 정도였다. 영국 관리 스티븐 클리솔드에 따르면, 미하일로비치는 처음에 회의 참석을 매우 꺼렸지만, 칼라비치에게 결국 설득되었다. 네디치는 독일군으로부터 무기를 얻고, 세르비아 국가 친위대를 미하일로비치의 지휘 아래 두는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전향을 시도하는 과정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붉은 군대가 접근하자, 미하일로비치는 전쟁의 결과가 터키의 전쟁 참여와 마지막으로 연합군의 발칸반도 진입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유고슬라비아인들에게 국왕에게 충실할 것을 촉구했고, 페테르가 자신을 해임했다는 라디오 방송 내용을 믿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쥬리시치는 명목상 료티치의 부대와 관련된 몬테네그로 자원 봉사단을 이끌면서 다시 한번 미하일로비치의 지휘를 받아들였다. 미하일로비치는 9월 1일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의 부대는 독일군과 불가리아군과 싸우는 동시에 파르티잔의 공격도 받았다. 9월 4일, 미하일로비치는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그의 명령 없이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내용의 순환 전보를 발령했다. 독일 자료는 이 기간 동안 미하일로비치와 그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는 부대의 충성심을 확인한다. 그런 다음 파르티잔은 체트니크 지역에 침투하여 어려운 전투를 벌였고, 10월까지 미하일로비치의 주력 부대를 결국 격파했다.
1945년 1월, 미하일로비치는 오즈렌 고지에서 부대를 재편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격감하고 지쳐서 일부는 무기와 탄약을 팔거나 지역 주민을 약탈했다. 1945년 3월 17일, 미하일로비치는 보스니아에서 독일 사절 슈테르커의 방문을 받았는데, 슈테르커는 미하일로비치에게 이탈리아에 있는 연합군 사령부에 독일의 비밀 항복 제안을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하일로비치는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4월 13일, 미하일로비치는 세르비아로 돌아가 저항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280km 길이의 행군을 시작하여 보스니아 북부로 향했다. 그의 부대는 우스타샤와 파르티잔과의 충돌, 그리고 불화와 티푸스로 인해 격감했다. 5월 10일, 그들은 유고슬라비아 군대(파르티잔의 재편성된 부대)에 의해 젤렌고라 전투에서 공격받아 패배했다. 미하일로비치는 점차 해산되는 1,000~2,000명의 병력과 함께 탈출했다. 미하일로비치 자신은 소수의 부하와 함께 산속에 숨었다.
2. 3. 체포, 재판 및 처형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미하일로비치를 생포하여 대대적인 재판을 열고자 했다. 1946년 3월 13일, 미하일로비치는 마침내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의 상세한 내용은 16년 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한 설에 따르면, 영국 정보원으로 위장한 이들에게 도움과 탈출 제안을 받고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OZNA가 설치한 함정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제시한 또 다른 설은 니콜라 칼라비치가 은신처를 밝히는 대가로 관용을 얻기 위해 그를 배신했다는 것이다.
1946년 6월 10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공동 피고인으로는 체트니크 운동의 다른 주요 인물들과 슬로보단 요바노비치 등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 구성원들(궐석재판), 그리고 ZBOR 및 네디치 정권 구성원들이 포함되었다. 주 검사는 밀로시 미니치였으며, 그는 훗날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었다. 1944년 미하일로비치가 구출했던 연합군 조종사들은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없었다. 미하일로비치는 여러 질문을 회피하며 일부 부하들의 무능과 명령 불복종을 비난했다. 요조 토마세비치에 따르면, 이 재판은 미하일로비치가 지역 사령관들을 확고하고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미국에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공정한 재판을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미하일로비치는 최후 진술에서 "나는 많은 것을 원했고, 많은 것을 시작했지만, 세상의 폭풍이 나와 나의 일을 휩쓸어갔다."라고 말했다.
로버츠는 이 재판이 "정의의 본보기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평가하며, "미하일로비치가 그에게 제기된 모든 혐의, 또는 심지어 많은 혐의에 대해 유죄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하일로비치가 승리했다면 티토 역시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하일로비치는 반역죄와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7월 17일에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는 리시치이 포톡에서 다른 9명의 장교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그곳은 이전 왕궁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이다. 그의 시신은 석회로 덮였고, 무덤은 표지되지 않은 채 위치는 비밀로 유지되었다.
3. 평가
미국은 1948년 체트니크의 첩보 활동을 평가하여 미하일로비치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Legion of Merit)을 수여했으나,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를 배려하여 비밀로 부쳐졌고, 2005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딸에게 수여되었다.[7] 손자 보이슬라브의 청원을 받아들여 2015년 세르비아 고등법원은 티토 정권의 판결을 파기하고 드라자 미하일로비치(Dragoljub Mihailović)의 명예를 회복했다.[7] 고등법원은 2015년 5월 14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명예를 회복했다. 이 판결은 1946년에 내려진 사형 선고와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 박탈 판결을 뒤집는 것이다. 판결에 따르면, 공산주의 정권은 정치적, 이념적으로 동기가 부여된 재판을 연출했다.[7]
그러나 크로아티아 등 주변 국가에서는 여전히 전쟁범죄자로 증오받고 있으며, 이 명예회복은 비난을 불렀다.[7] 2012년 3월, 보이슬라브 미하일로비치는 고등법원에 그의 할아버지인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명예회복을 요청했다. 이 발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모두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단 구성원인 젤코 콤시치는 명예회복이 통과될 경우 세르비아 주재 보스니아 대사의 소환을 옹호했다. 전 크로아티아 대통령 이보 요시포비치는 명예회복 시도가 세르비아에 해롭고 역사적 사실과 배치된다고 말했다. 그는 미하일로비치가 "전범이며 체트니크는 친나치 범죄 집단"이라고 설명했다. 크로아티아 외무장관 베스나 푸시치는 명예회복이 세르비아에 고통만 가져올 것이라고 언급했다. 세르비아에서는 14개의 비정부기구(NGO)가 공개 서한에서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명예회복 시도는 세르비아인과 전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모든 사람들의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깎아내리는 행위"라고 밝혔다.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 회원들은 고등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4. 유산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및 정치적 견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그를 협력자로 간주하여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샤를 드 골은 "순수한 영웅"으로 칭송하며 옹호했다. 윈스턴 처칠은 미하일로비치가 독일군과 협력했다는 정보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더욱 분별력 있게 세르비아 애국자들의 명단에서 지워서는 안 된다"라고 결론지었다.
전쟁 중 독일군 남동부 최고 사령관이었던 폰 바이크스 원수는 미하일로비치의 부대가 왕에 대한 충성심과 반공주의적 신념 때문에 독일군과 티토 양측 모두와 싸웠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한 미하일로비치가 영미의 상륙 시 티토에 맞설 지원을 기대하며 시간을 벌고자 했으며, 독일은 그의 지원을 일시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리처드 L. 펠만 소령 등의 노력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미하일로비치에게 체트니크의 미군 조종사 구출 공로를 인정하여 사후 공훈훈장을 수여했다. 이 상과 구출 이야기는 유고슬라비아 정부를 불쾌하게 하지 않기 위해 비밀로 분류되었다.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세르비아에서는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니크에 대한 복권 움직임이 일어났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동안 여러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가 체트니크를 자칭했으며, 세르비아 준군사 조직은 종종 자신을 체트니크로 동일시했다. 2004년 세르비아 의회는 미하일로비치를 공식적으로 복권시켰다. 2015년 세르비아 고등법원은 티토 정권의 판결을 파기하고 미하일로비치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라브나 고라(1992), 이반지차, 라포보, 수벨, 비셰그라드 근처 우드룰예, 페트로보 등지에 그의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세르비아 공화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많이 존재한다. 크라구예바츠에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다른 유고슬라비아 이후 국가에서는 미하일로비치를 여전히 전쟁 범죄자로 간주하며, 그의 복권에 대해 비난하는 여론이 존재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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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menici „rehabilitovali“ Dražu (Monuments "rehabilitated" Draž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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